AI 회사가 희귀한 서적을 파쇄하고 있다
2026년 7월 27일 Hacker News에서 705포인트에 댓글 449개가 달린 이야기입니다. AI 회사들이 희귀본을 포함한 헌책을 대량으로 사들여 스캔한 뒤 원본을 폐기하고 있습니다.
표준 팔레트 하나에 800권에서 1,200권이 들어갑니다. 한 번에 천 권 내외의 책을 지게차로 옮기며 스캔한다는 것이죠. 구매자는 시범 발주에서 시작해 배치당 1만 권 이상으로 늘립니다. 책등을 잘라낸 뒤 파괴형 스캐너가 분당 80페이지에서 120페이지를 처리하고, 원본은 펄프가 됩니다. 중개업체는 대부분 NDA로 가려져 있어서 최종 구매자가 누구인지 드러나지 않습니다.
Anthropic은 과거 Project Panama라는 내부 프로젝트로 이 작업을 대규모로 수행했습니다. 내부 기획 문서에 "세상의 모든 책을 파괴적으로 스캔하는 것이 Project Panama의 목표"라고 적혀 있었고, 벤더 제안서는 6개월간 50만 권에서 200만 권 전환을 언급했습니다.
자기 참조적 고갈
웹 텍스트는 이제 AI 생성문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 오염을 만든 것이 언어 모델입니다. 그리고 다음 세대 모델을 학습시키려면 오염되지 않은 인간 저작 텍스트가 필요합니다. 자기 출력으로 오염된 데이터로 학습하면 품질이 무너진다는 것은 모델 붕괴 연구에서 반복 확인된 결과입니다.
그래서 2022년 이전에 인쇄된 종이책이 마지막으로 남은 대규모 비오염 저수지가 됐습니다. 물리적으로 인쇄된 시점이 증명서 역할을 합니다.
모델이 웹을 오염시켰기 때문에 모델이 현실 세계에서 데이터를 찾아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현실의 원본이 사라집니다. 오염의 원인이 원본 소멸의 원인이 됩니다.
파괴적 스캔
실제 서적을 학습 데이터로 쓰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왜 굳이 책을 파괴하는지가 문제입니다.
비파괴 스캔은 책을 펼친 채 위에서 찍습니다. 그러면 두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 페이지를 사람이나 로봇 팔이 넘겨야 합니다. 페이지당 시간이 몇 배로 늘어납니다.
- 펼친 책은 제본 쪽으로 페이지가 휘어 있어서 글자가 곡면 위에 놓입니다. 곡률 보정을 거쳐도 OCR 정확도가 떨어지고, 안쪽의 글자는 그림자가 집니다.
책등을 자르면 낱장이 됩니다. 낱장은 시트 피더로 자동 급지되고 완전히 평평합니다. 분당 80페이지에서 120페이지라는 속도와 높은 OCR 정확도가 여기서 나옵니다.
파쇄는 악의가 아니라 최적화의 결과입니다. 많은 AI 회사가 같은 결정을 충분히 내릴 만하다는 뜻이고, 그래서 다루기가 더 까다롭습니다.
법원의 판단
미 연방법원은 구매한 책을 디지털화하고 물리 사본을 폐기하는 행위를 공정이용으로 판단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법원의 판단에 화내기 전에, 어떤 법으로 이 사안을 다루어야 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재물손괴?
재물손괴는 타인의 재물을 전제합니다. 이들은 책을 정당하게 샀습니다. 자기 소유물을 파괴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적법합니다.
문화재 보호법?
문화재 보호 계열도 맞지 않습니다. 그쪽은 지정된 객체를 대상으로 하는데, 1950년대 지역 출판물이나 절판 학술서는 지정 문화재가 아닙니다. 지정 문화재는 개별 심사라 느립니다. 우리가 다루는 문제는 배치당 1만 권 단위로 벌어집니다. 심사가 따라갈 수 있는 속도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원고가 없습니다. 소유자가 자기 물건을 없애는데 누가 소를 제기하나요? 공공의 접근 이익에는 현행법상 청구권자가 없습니다.
저작권법?
파괴는 법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복제는 보입니다. 책을 스캔하는 순간 복제가 성립하고, 그건 일단 침해입니다. 그래서 회사에는 공정이용이라는 항변이 필요합니다. 드디어 무언가 걸렸네요.
그런데, 저작권법에서 복제가 성립하려면 사본이 늘어나야 합니다. 원본을 사서 스캔하고 원본을 없애면 세상에 존재하는 사본 수가 그대로입니다. 형식만 종이에서 디지털로 바뀐 것이라 매체 변환에 가깝습니다.
반대로 스캔한 뒤 원본을 그대로 두면 사본이 하나 늘어난 셈이 됩니다. 도리어 공정이용 판단이 불리해집니다. 그러니까 법이 폐기를 금지하는 게 아니라, 폐기를 하지 않으면 오히려 법적 위험이 커지는 구조입니다.
원본을 없애야 사본 수가 늘지 않아 공정이용에 유리해진다는 판단은 저작권 교리 내부에서 나왔습니다. 문제를 만든 것이 그 교리라면 뒤집는 것도 거기서 해야 합니다. 형벌 조항을 새로 얹어도 공정이용 판단은 그대로 남고, 폐기는 여전히 면책에 유리하게 작동합니다.
의도 요건도 걸립니다. 반달리즘은 파괴하려는 의사를 전제하는데, 여기서 파괴는 처리량 최적화의 부산물입니다. 없는 고의를 인정해 달라고 법원에 요구하는 셈이 됩니다.
그런데 말이죠, 책을 샀다고 복제권을 산 것은 아닙니다.
최초판매원칙이 주는 것은 그 사본 하나에 대한 처분권입니다. 되팔든 빌려주든 태우든 자유이고, 파쇄가 적법한 근거도 여기입니다. 하지만 복제권은 넘어오지 않습니다. 정당하게 산 책이어도 스캔하는 순간 복제가 성립합니다. 그래서 구매 여부와 무관하게 공정이용 항변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아예 사지 않고 내려받으면 어떻게 될까요. 2025년 6월 Alsup 판사가 Bartz v. Anthropic에서 취득 경로로 결론을 갈랐습니다.
취득 경로 |
판단 |
|---|---|
합법 구매한 실물 책을 스캔해 학습 |
공정이용. 본질적으로 변형적 |
LibGen, PiLiMi 등 해적 라이브러리에서 내려받아 보관 |
공정이용 아님. 침해 |
Anthropic은 2025년 8월 15억 달러에 합의했습니다. 약 50만 권 분량이고 미국 저작권 소송 사상 최대 규모입니다.
이 판결이 파쇄 파이프라인의 나머지 절반을 설명합니다. 앞에서 데이터 고갈을 동기로 들었지만, 법적 압박이 같은 크기의 동기였습니다. 해적판 경로가 15억 달러짜리 위험이 되자 남은 합법 경로는 실물을 사는 것뿐이었고, 사서 스캔하면 이번엔 원본을 없애야 공정이용에 유리해집니다.
저작권 집행이 강해진 결과가 물리적 원본의 소멸을 앞당긴 것입니다. 팔레트 파쇄는 무단 사용 단속의 부작용에 가깝습니다.
합의 조건이 이 구조를 완성합니다. Anthropic은 토렌트로 받은 원본 파일과 거기서 파생된 사본을 전부 파기해야 합니다. 저작권 구제가 보존이 아니라 파괴를 명령하는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무단 사용 쪽으로 가도 보존은 얻지 못합니다. 15억 달러는 저작권자에게 갔고 책은 한 권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침해 구제는 손해배상이지 보존 명령이 아닙니다. 원고가 권리자이고, 권리자는 돈으로 합의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사라지는가
대량 유통된 베스트셀러는 어차피 다른 곳에도 남아 있습니다. 실질적 손실은 희귀본과 외국어본에서 발생합니다.
발행 부수가 적었던 지역 출판물, 소수 언어로 쓰인 책, 절판된 학술서. 이런 책은 세상에 남은 부수 자체가 적습니다. 그중 하나가 팔레트에 실려 들어가서 스캔되고 파쇄되면, 그 텍스트는 어느 회사의 학습 데이터셋 안에만 존재하게 됩니다.
학습 데이터셋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검색할 수도, 인용할 수도, 다시 읽을 수도 없습니다. 책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공공 접근에서는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 도서관이 만들어 온 접근 체계 바깥으로 텍스트가 이동하는 것입니다.
정리
책을 태우는 것과 이 일은 다릅니다. 태우는 쪽은 텍스트를 없애려는 의도가 있고, 이쪽은 텍스트를 쓰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공공이 그 텍스트에 닿을 수 없게 된다는 결과는 겹칩니다.
해결책은 파쇄 자체보다 접근 쪽에 있습니다. 파괴적 스캔이 처리량 최적화의 결과라면 그걸 금지하기는 어렵습니다. 대신 파괴 스캔을 한 주체에게 해당 스캔본을 공공 아카이브에 기탁할 의무를 지우는 방식은 가능합니다. 공정이용은 조건부 특권이라 조건을 붙이기에 적합하고, 출판계의 납본제도가 이미 같은 구조로 작동합니다. 지금은 폐기가 면책 요건처럼 작동하는데, 기탁을 면책 요건으로 바꾸면 인센티브가 뒤집힙니다.
다만 이 제안에는 구멍이 둘 있습니다.
첫째가 더 치명적입니다. 저작권 훅은 아직 보호받는 책에만 걸립니다. 그런데 잃어서 가장 아까운 책, 즉 오래된 희귀본과 절판 학술서일수록 보호기간이 끝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퍼블릭 도메인이면 저작권이 없고, 저작권이 없으면 침해도 공정이용도 없습니다. 항변이 필요 없으니 조건을 붙일 자리 자체가 사라집니다. 권리자를 찾을 수 없는 고아 저작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렛대와 문제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셈입니다.
둘째는 라이선스 우회입니다. 저작권법은 권리자를 보호하지 공공을 보호하지 않습니다. 회사가 공정이용에 기대지 않고 출판사와 계약을 맺어버리면 기탁 조건은 발동조차 하지 않습니다. 권리자가 대가를 받고 합의하면 그 텍스트에 대한 공공의 이익은 협상 테이블에 오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저작권법은 차선입니다. 지금 당장 조건을 붙일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이라 거기서 시작하는 것이고, 원래 필요한 것은 사유물이 된 마지막 사본에 공공이 주장할 수 있는 별도의 청구권입니다. 일부 국가의 문화재 반출 규제나 사유 지정물 개조 제한이 그 원형이긴 한데, 헌책 수만 권 규모에 적용할 수 있는 형태로는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출처는 2026년 7월 27일 Hacker News 스레드와 Washington Post, TNW, Yahoo News, Dallas Express 보도입니다. Project Panama 내부 문서는 Washington Post 취재로 처음 공개됐습니다.